마음속에 어쩌면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법한, 조금은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2025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런 말을 듣거나 하곤 하죠.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런 힘든 일 한다~” 라구요.

어릴 적 부모님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이 말. 사실 우리는 이 말이 가진 차별적인 시선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래도 공부해야 더 편하게 사는 건 사실이잖아?’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을 거예요. 오늘은 이 낡은 명제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우리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생각들을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

공부와 직업

“현실”이라는 이름의 차별, 정말 괜찮을까요?

솔직히 한번 터놓고 이야기해봐요! “좋은 대학 나와야 좋은 회사 가서 편하게 일하는 거, 이게 현실이잖아! 공부 안 하면 남들이 기피하는 일,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라고, 우리의 무의식이 속삭일 때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의 차이라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생각은 마치 공식처럼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았어요. ‘성실한 공부 = 더 높은 소득과 편안한 직업’이라는 공식 말이에요. 하지만 이 공식, 정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걸까요?!

하지만, 출발선은 정말 같았을까요?

현실적으로 공부를 잘하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게 ‘공부 못한 사람 = 가치 없는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에요. 만약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모든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아주 위험한 일이 되고 맙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친구는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고가의 사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수 있어요. 반면에, 어떤 친구는 지방 소도시에 살아서 제대로 된 학원 한번 다녀보지 못하고, 심지어 가정불안으로 매일을 두려움 속에서 보냈을 수도 있죠.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던 아이가 나중에 힘든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야” 라고 손가락질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그건 너무나 폭력적인 말이 아닐까요?

숫자가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건 데이터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교육격차 실태 종합분석 연구’ 자료를 보면, 부모의 월 소득이 700만 원 이상인 가구의 자녀가 소위 ‘SKY’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10.5%에 달했어요. 반면에 월 소득 300만 원 미만 가구 자녀의 진학률은 고작 0.9%에 불과했답니다.

어떤가요? 이 수치를 보고도 “공부 잘하면”이라는 전제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과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구조적 불평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당장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해야 하는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공부 못하면 저런 일 한다”고 말하는 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공정함이라는 함정, 그리고 차별의 정당화

네, 맞아요. 이런 데이터를 보고 나면 출발선이 다르다는 건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오케이, 출발선이 다른 건 알겠어. 하지만 만약에 비슷한 환경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건 오히려 불공평한 거 아니야?” 라고 말이죠.

사실 이게 “공부 안 하면 저런 일 한다”는 말이 가진 가장 무서운 지점이에요. 이 말은 ‘공정성’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탈을 쓰고 있거든요. 우리는 속으로 생각하죠. ‘힘든 일, 남들이 싫어하는 일은 누군가 해야만 해. 그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의 몫이야.’ 라고요.

‘귀천 없는 직업’이라는 위선

바로 그 지점에서 ‘차별의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해요. 사람들은 입으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내 자식이 그 일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말릴 거예요. 그 직업 자체는 사회에 필요하지만, ‘내 소중한 자식’이 할 일은 아니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있는 거죠.

이런 위선적인 가치관은 결국 특정 직업에 대한 사회적 무시로 이어집니다. ‘어차피 공부 못한 애들이나 하는 일이니 최저시급만 줘도 감지덕지야’, ‘그 정도 고생은 당연한 거 아니야? 노력을 안 했는데 뭘.’ 이런 생각들이요. 이건 명백히 그들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구분하고 낮춰보는 차별 아닌가요?

차별의 부메랑: 언젠가 당신을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차별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할 때, 그 차별은 돌고 돌아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 향하게 될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지금은 젊고 건강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나이가 들고 약해지겠죠? 지금은 비장애인이지만,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될 수도 있어요. 지금은 잘 나가지만, 언제든 실패하고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약자에 대한 차별을 ‘그럴 만하니까’라며 용인하는 순간, 우리가 약자가 되었을 때 똑같은 논리로 차별받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을 정당화해서는 안 돼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요.

##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 ‘악의 평범성’을 넘어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어요. 거대한 악은 특별한 악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각 없이 관습을 따르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뜻이죠. “공부 못하면 저런 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그 평범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주고 사회 전체의 차별을 단단하게 만드는 ‘평범한 악’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공부해라!”라는 말 대신 이런 말들을 해주는 건 어떨까요?

  •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의 쓸모가 있단다.”
  • “우리가 편안하게 사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며 세상을 지탱하는 분들 덕분이야. 항상 감사해야 해.”
  •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더 존중해야 하는 거란다.”
  •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이야.”

‘어른 김장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다” 라고요. 맞습니다. 특별한 소수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내는 평범한 우리 모두가 이 사회의 주인공이에요. 평범한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오늘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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